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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작가의 문학 세계

  • 박영준
    만우 박영준 선생의 생애 소설가. 호는 호는 만우(晩牛)·서령(西嶺).1911년 평남 강서군에서 목사인 박석훈의 차남으로 출생하였고, 평양 숭실중학교와 광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4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장편 『일년 一年』이 ‘신동아’ 현상 소설에 당선되고, 이어 단편 「모범경작생」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콩트 「새우젓」이 ‘신동아’에 동시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했다. 1935년 고향의 ‘독서회’ 사건으로 일경에 피검되어 5개월간 구류를 당하였고, 1938년 만주 길림성 반석현으로 이주하여 교편생활을 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신세대사(新世代社)에 입사하였다. 1948년 경향신문사 문화부에 근무하였고, 1950년 6․25동란 당시 피란을 못하고 있다가 인민군에 납치되어 북송 도중 개천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1951년에는 육군본부 정훈감실 문관으로 복무, 종군작가단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종군작가의 일원으로서 일선에 종군하는 모험도 겪었다. 1955년 연희대학교와 수도여자사범대학 강사, 1959년 한양대학교 부교수를 거쳐 1962년부터 연세대 문리대 국문학과 교수로 근속하였으며, 예술원 회원을 역임하였다. 부인 정숙용 여사 사이에 2남(박승렬, 박승언) 1녀(박경림)를 두었다. 1954년 단편집 『그늘진 꽃밭』(1953)으로 제1회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하고, 1965년 제14회 예술원상을, 1967년에는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주요작품집은 다음과 같다. 제1단편집 『목화씨 뿌릴 때』(46), 『풍설』(51), 『그늘진 꽃밭』(53), 『푸른 치마』(56), 『방관자』(60), 『고호』(64), 『추청』(68), 『슬픈 행복』(71) 등이 있고, 장편 『한류의 어족』 『애정의 계곡』(54), 『청춘병실』(55), 『열풍』 『파도와 모래 합창』(59), 『오늘의 신화』(60), 『결혼학교』(64), 『종각』(65), 『가족』(67), 『산이 운다』(68), 『고속도로』(69), 『이중 남자』(70), 『보라색 가면』(7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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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선덕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우리 집 어른들은 작고 힘없는 생명을존중하며 아꼈다. 정의롭고 정직하였다. 그런 분들 대부분 그렇듯, ‘죽으면 썩을 몸’하며 이를 데 없이 부지런하였다. ​우리 집 어른들의 부지런함과 창의력과 올곧음은 어린 나에게 수많은 영감의 원천이었다.​ 아버지 우문국의 젊은 날, 상해 유학시절 어머니 최분순의 30대, 어머니가 맨손으로 낸 수예점에서  아버지의 노년 2011년 7월초.통영 김용익문학상, 이제 아버지는 안 계시지만.​ 인천박문여중에서 정서웅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명심보감 책자 속에 써주셨다.‘옳고 떳떳한 사람은 어떤 불행도 이길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베토벤-’ ​내가 글을 쓰는 아이가 아닌데 느닷없이 이러셨다. “선덕아 너는 나처럼 필을 꺾으면 안 된다. 끝까지 필을 놓지 말거라.” ​선생님과 베토벤과 명심보감도 내가 사람이 돼 가는데 영향을 주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는 황순원, 조병화, 김우종 박용주 양주동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다. ​선생님들의 좋은 면은 내 인생과 문학에서 좋은 쪽으로 본이 되었다.  황순원 선생님, 안양 사실 때1988년1월 여중졸업42년 만에 정서웅 선생님과 친구 순애 안양. 1988. 같은 날 박용주 선생님과 여동생 우미령기억에 남는 유아기의 장소는 인천시립도서관 사택과 정원이다. ​사택에는 여러 가구가 살았다. 우리가 쓰던 방은 크고 넓었다. 앞면은 거의가 유리창이어서 환했다.어머니 최분순은 결핵성 늑막염으로오래 앓았다.​아버지 우문국은 그림을 그렸다.인천의 각 남녀중고 미술 선생님, 문화원을 세우고 박물관장 역임 등 교육자와 문화행정가로도 바빴다.집에 들여오는 돈은 없었다. ​병약한 어머니는 맨손으로, 그러나 뛰어난 두뇌와 재능과 성실함과 자식에 대한 책임감으로 결국 평생 식솔을 떠맡았다. ​다정다감한 낭만소녀 어머니는 강하고 위대했다.도서관 정원 오래된 진달래 관목에 오빠와 마주앉아 꽃잎을 따먹었다.그 후 여동생과 남동생이 태어나 우리 형제는 사남매가 되었다. 여섯 살. 인천시 도화동 235번지 동네로 이사 갔다. 훌륭한 분이 많이 살던 좋은 동네였다. 동네는 군사독재정권의 권력만행 덕분에 없어졌다.창영국민학교에 입학했고 숭의국민학교로 전학했으며 4·19, 5·16을 보았다. 제물포역이 근방이라 역에 나가 사람 구경을 하고는 했다. 동네 뒤쪽 언덕 너머 한참 걸어가면 주안염전이 있었다.여름에는 염전에 많이 갔다. 염전, 그 저수지와 염전이 그립다. 염전도 오래전에 없어졌다. 박문여자중고등학교를 나왔다. 경희대학교에 문예장학생으로 얼떨결에 입학하여 4년 다녔다. 4학년인 1975년, 눈이 무척 많이 온 크리스마스 즈음 용꿈을 꾸었는데이러한 내용의 전보가 왔다.※축 당선 급 래사 한국일보※ 이듬해 1976년대학원에 진학하다. 그때쯤 인천 어머니의 집은 주안 무슨 동, 그다음 간석동 등지로 이사 하였으며 나는 서울에 살았다. 철 없고 계산 없는 철부지 사람 28세. 치기어린 삭발도. 27세. 지금이나 저때나 사실 여전히 순진무구한 사람1998년인가 <우문국 그림인생 50년> 이 비슷한 제목의 전람회를 인천시에서 아버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열어주었다. ​전람회 일주일쯤 후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7월22일이었다. ​아는 이들이 그 여름 중복(中伏) 언저리에 바빴다. 두 번 세 번 우리 집 일에 와야 했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외할머니는 96세에, 아버지는 83세에, 어머니의 네 살 위인 단 하나 자매, 이모는 86세에 돌아가셨다. 이제 어머니 한 분만 우리 형제, 나의 이종형제들에게 남아계신다. 2016년이면 87세가 되신다. 외할머니 연세만큼 만이라도 사시기를 기원한다. 많은 이들 인생이 그렇듯 나에게도 여러 일이 있었다. 그중 가장중요한 일은 우주를 헤매도 더는 찾지 못할 잘생기고 개성 있고 정의로우며 영민하고 총명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내가 낳았다는 사실이다. http://music.naver.com/album/index.nhn?albumId=329578아들의 첫 음반앨범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84015357&orderClick=LAG&Kc=딸이 어릴 때 쓴 일종의 동화책대학 입학하면서 올라온 서울에서 아직 산다. 서울 지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지금은 인천 지리도 잘 모른다. 상관없다.사랑하는 이들과 때로 다투고 화해하며 집고양이 넷, 마당고양이 하나, 동네 비둘기, 참새들과 어울려 산다. ​생에 대고 바랄 게 모두의 건강 외에는 없다.천상병 시인의 詩 「새」 마지막 연을 더러더러 떠올리고는 한다.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천상병 詩 「새」 마지막 연― 옥상, 아침마다 새들 모이를. 마당고양이 사랑이 위부터,호두,금동,니케,나나 생후10일쯤에 온 아가 나나우선덕 블로그 가기http://blog.naver.com/indra2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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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병석
    민벌에서 부는 바람 1947년 6월10일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 309번지, 일월산 줄기 끝자락이 한내(洪川) 앞에서 우뚝 멈춰선 용봉산 턱밑에서 태어났다. 호적등본을 떼보면 출생지는 중계리 309번지인데, 네이버지도로 검색해보면 태어나서 열 살까지 살던 집터는 중계리 65-5번지다. 중계리 309번지는 큰고모 집이 있던 자리인데, 아마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56번지 수덕사 아랫마을에서 살던 할아버지가 홍성군 지경으로 이주해올 때 집을 짓는 동안 큰딸 집에 머물렀고, 하필이면 그때(1914년) 일본인들이 호적을 정리했던 듯싶다. 일곱 살 때 집에서 5백 미터밖에 안 되는 용봉국민학교를 제쳐두고 십 리도 더 떨어진 홍성국민학교에 입학하겠다고 생떼를 썼다. 용봉국민학교는 전교생이 200명에 못 미쳤고, 홍성국민학교는 한 학급이 90명, 한 학년만 해도 1000명이 넘었다. 아버지는 읍사무소에 가서 가짜 호적초본을 떼어 와야만 했고, 나는 아침저녁 가파른 보패재를 넘어야 했다.국민학교 4학년 열 살 때, 나는 아이들의 서열싸움에 휘말려 많이도 얻어맞았다. 집이 멀어 마음 놓고 싸울 수 없는 입지조건 탓이었고, 그건 자초한 일이어서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집안이 폭삭 망한 덕분에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문혜리로 이사하게 되어 수렁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피란 갔던 원주민들과 황무지를 개간해 보겠다는 타관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지만, 전학해 간 문혜국민학교는 집에서 십 리나 떨어진 곳에 있었고, 규모는 딱 용봉국민학교만 했다. 특별활동 시간에 축구부를 찾아갔더니 7번이나 11번 날개를 시켜 죽어라 뛰어다니게 만들었다. 집이 먼데다 배도 쉽게 꺼지고, 운동화까지 푹푹 닳아서 결국 기권하고 말았다. 다음엔 미술반을 기웃거려 봤지만 에누고(그림물감) 살 일이 만만찮아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되는 문예반에 들어감으로써 잘코사니, 고생길로 들어섰다. 고교시절의 오솔길동인들 실업계 장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방침에 따라 ‘타시도 진학’은 실업계만 허용하는 바람에 고향의 홍성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때 홍성고등학교는 장항선 주변 10개 시군에 단 하나뿐인 인문계 고등학교였는데, 2학년 봄에는 3학년이던 최홍이 선배가 교내백일장에 입상했던 학년생들을 모아 ‘홍양동인회’를 조직하기도 했고, 여학교 학생들과 ‘오솔길동인’을 만들어 시화전도 열고 합평회도 하는 등 글쟁이 흉내에 열을 올렸다. 3학년 때 1년 동안 권영민과 자취를 했는데, 공부에 전념하여 전교 1등을 하다가 서울대학교로 진학한 그는 일찌감치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뚫어 문단에 나왔고, 글쟁이 흉내 내기를 일삼던 나는 그보다 10년이나 늦게야 겨우 시인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돌아보면 그 시절에도 학생회 부회장을 맡아 정치에 관심을 보였던 최홍이 선배는 서울시의회 교육위원장을 지냈고, 학구적이었던 권영민은 서울대 교수에다 당대의 문학평론가로 우뚝 섰다. 1974년에는 아마추어 시인 300여 명이 모인 ‘시인의 집’ 동인을 결성, 조선일보의 후원을 받아 덕수궁 북쪽 담에 붙어있던 국립공보관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그 시화전 기간이던 8월15일 서울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었고, 장충체육관에서 육영수 여사가 피격을 당했다. ‘시인의 집’은 그 뒤 1995년까지 20여 년 동안 용산도서관에서 <시소리 시낭송회>를 여는 등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100여 명의 시인을 배출하였다. 1981년에는 시 ‘민벌에서 부는 바람’으로 월간문학신인상에 입선하자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슴에 품었던 ‘장차 시인이 되리라는 꿈’이 이루어졌다는 착각에 빠진 나머지, 첫 시집 『넝쿨담장』(개마서원)을 묶어냈다. 1984년에는 두 번째 시집 『오월에 날아온 수상한 꽃가루』(시인의집)를 묶어냈는데, 이때는 줄곧 앓고 있던 위궤양이 심해져 암에 걸린 게 틀림없다고 지레짐작하여 유고집을 엮는 심정으로 그동안 썼던 모든 작품을 망라했으며, 덕분에 당국에 불려가서 시 두 편(‘흉가’와 ‘애국가’)을 삭제하는 동시에 서점에서 회수하겠다는 각서를 썼다.회사에서 베풀어준 신춘당선 축하연, 최일남 선생님과 김중배 선생님이 술잔을 높이 들었다 1986년에 이르러서야 단편소설 ‘낱말찾기’가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됐는데, 1966년 겨울부터 한 해도 빼놓지 않고 신춘문예 소설을 투고하여 19번이나 낙방한 끝이었다. 1988년에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마음을 비워야 하고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온갖 허섭스레기마저 끌어안아야 했으므로, 소설 창작에만 전념하기로 하고 마지막 시집 『사랑쌓기』를 묶어냈다. 1990년에는 소설집 『낱말찾기』(문예출판사)를, 1991년에는 소설집 『어둠꽃』(도서출판 예문)을, 1991년에는 장편소설 『서있는 자의 꿈』(문예출판사)을, 1995년에는 장편소설 『거꾸로 흐르는 강』(중앙일보사․전 3권)을, 2000년에는 장편소설 『궁예』(태동출판사․전 3권)를 묶어냈다.오효진 선생님이 청원군수로 재직하실 때 동아일보문학회 회원들을 유채꽃밭으로 초청했다 2004년에는 한국소설가협회에서 제명처분을 받았고, 2005년 뜻을 같이한 분들과 함께 『계간문예』를 창간하며 편집장을 맡았으며, 장편소설 『누가 너를 시인이라 불렀는가』(계간문예)를 묶어내어 월간문학동리상을 받았다.2010년에는 한국소설가협회 상임이사를 맡아 이동하 이사장을 돕게 되었고, 2011년 장편소설 『초록의 전설』(bookin)을 묶어내어 노근리평화문학상을 받았다. 2011년 1월부터는 백시종 선배로부터 동아일보문학회 회장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별다른 활동을 못해 전전긍긍하게 되었고, 월간 『한국소설』을 편집하는 가운데 2015년 9월부터 12월까지 우선덕 소설가와 함께 [한국디지털문학관] 실무를 맡았다.부여국 졸본성에서 탈출한 주몽이 고구려의 터를 잡았던 오녀산성
    서 있는 자의 꿈 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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