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천의 봄비
1940년 일제가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중국 땅에 세운 괴뢰정부 만주국 심양(沈陽)의 호로도(胡虜島)라는 곳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강영중, 어머니 박음전이다. 위로 형 두 분이 모두 출생지가 다르다. 큰형님은 경남 김해이고 작은형님은 일본의 오사카다. 선친이 나라를 뺐긴 당시의 다른 사람들처럼 먹고 살기위해 동분서주한 결과다.
필자가 출생한 이듬해, 당시 창궐했던 장티푸스로 27살의 모친이 사망했다. 이모부와 동업으로 목재상을 했던 부친은 이듬해 일시 귀국해서 권무선과 재혼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나라가 해방되면서 일가는 귀환동포로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김해로 귀국했다. 당시 필자의 나이 5살이었다.
학령기가 되자 집에서 5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대저 중앙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월사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 오기 일쑤였다. 논 스무 마지기(3,000평)를 경작했으나 수해와 병충해에, 먹을 것도 남기지 않고 공출이라는 것을 내고나면 먹을 양식이 없었다. 당시 대부분의 농가가 같은 형편이었다. 봄이 되면 동네마다 굶어죽은 사람이 나오고 살아있는 사람도 누렇게 부황이 들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학교를 미군에게 내주고 마을 공회당에서 공부를 했다. 교과서와 공책이 없었다. 국어교과서로 운크라에서 지원한 낱장의 종이에 인쇄된 것을 나눠줬다. 그 교재에 나왔던 동요가 강소천의 <봄비>였다.
2015년 필자
나는나는 갈테야, 꽃밭으로 갈테야. 꽃봉오리 만지러 꽃밭으로 갈테야.
나는나는 갈테야, 연못으로 갈테야. 동그라미 그리러 연못으로 갈테야. (이하 생략)
이 동요가 필자를 문학으로 이끈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부터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시골에선 책이 귀했다. 누구네 집에 책이 있다면 십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학원』 『아리랑』 『야담과 실화』 『청춘』 『희망』이라는 잡지들이 나오던 무렵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서 2년 후 부산으로 가출했다. 오갈 데 없이 노숙도 하고 밥을 굶으면서 시립도서관에서 마음껏 책을 읽었다. 겨우, 작가라는 대열에 끼긴 했으나 과연 필자가 작가인지 아직도 자신이 없다. 단 한 편의 작품도 내세울 것이 없고 평가를 받은 적이 없다.
전자책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주저주저하다가 책과 파일을 보낸다. 그래도 속내가 있다. 뻔뻔하긴 하지만 혹시라도 필자의 글을 읽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프로필
1940년 중국 심양에서 출생.
1968년 총무처 주관 공개시험을 거처 기상직 공무원으로 임용됨.
이후 기상대장과 예보관을 역임.
1970년 강원도 속초에서 이상국 박명자 이성선 최명길 윤홍렬 김춘만 등과 설악문우회 동인 모임을 조직하고 동인지 『갈뫼』1집을 발간함.
1971년 강원도 속초에서 초등학교 교사인 김연숙과 결혼.
1973년 여식 혜연 출생.
1974년 아들 형구 출생.
1975년 현대문학지에 「산령」 「영역」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옴. 이후 「북녘나그네」 「매머드 사냥」 「다리 밑에 있는 집」등 장편 중편 단편소설 100여 편을 발표함.
1999년 기상청을 퇴직하고 작품 창작에 전념.
송원희 선배와
소설가동료들과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로 만들어진 <소설걷기>란 모임에서 북한산 둘레길 걷기
위와 같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