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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민벌에서 부는 바람



1947610일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 309번지, 일월산 줄기 끝자락이 한내(洪川) 앞에서 우뚝 멈춰선 용봉산 턱밑에서 태어났다. 호적등본을 떼보면 출생지는 중계리 309번지인데, 네이버지도로 검색해보면 태어나서 열 살까지 살던 집터는 중계리 65-5번지다. 중계리 309번지는 큰고모 집이 있던 자리인데, 아마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56번지 수덕사 아랫마을에서 살던 할아버지가 홍성군 지경으로 이주해올 때 집을 짓는 동안 큰딸 집에 머물렀고, 하필이면 그때(1914) 일본인들이 호적을 정리했던 듯싶다.


일곱 살 때 집에서 5백 미터밖에 안 되는 용봉국민학교를 제쳐두고 십 리도 더 떨어진 홍성국민학교에 입학하겠다고 생떼를 썼다. 용봉국민학교는 전교생이 200명에 못 미쳤고, 홍성국민학교는 한 학급이 90, 한 학년만 해도 1000명이 넘었다. 아버지는 읍사무소에 가서 가짜 호적초본을 떼어 와야만 했고, 나는 아침저녁 가파른 보패재를 넘어야 했다.

국민학교 4학년 열 살 때, 나는 아이들의 서열싸움에 휘말려 많이도 얻어맞았다. 집이 멀어 마음 놓고 싸울 수 없는 입지조건 탓이었고, 그건 자초한 일이어서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집안이 폭삭 망한 덕분에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문혜리로 이사하게 되어 수렁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피란 갔던 원주민들과 황무지를 개간해 보겠다는 타관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지만, 전학해 간 문혜국민학교는 집에서 십 리나 떨어진 곳에 있었고, 규모는 딱 용봉국민학교만 했다. 특별활동 시간에 축구부를 찾아갔더니 7번이나 11번 날개를 시켜 죽어라 뛰어다니게 만들었다. 집이 먼데다 배도 쉽게 꺼지고, 운동화까지 푹푹 닳아서 결국 기권하고 말았다. 다음엔 미술반을 기웃거려 봤지만 에누고(그림물감) 살 일이 만만찮아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되는 문예반에 들어감으로써 잘코사니, 고생길로 들어섰다.

 

 

 

 

고교시절의 오솔길동인들

 

 

 

실업계 장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방침에 따라 타시도 진학은 실업계만 허용하는 바람에 고향의 홍성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때 홍성고등학교는 장항선 주변 10개 시군에 단 하나뿐인 인문계 고등학교였는데, 2학년 봄에는 3학년이던 최홍이 선배가 교내백일장에 입상했던 학년생들을 모아 홍양동인회를 조직하기도 했고, 여학교 학생들과 오솔길동인을 만들어 시화전도 열고 합평회도 하는 등 글쟁이 흉내에 열을 올렸다.


3학년 때 1년 동안 권영민과 자취를 했는데, 공부에 전념하여 전교 1등을 하다가 서울대학교로 진학한 그는 일찌감치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뚫어 문단에 나왔고, 글쟁이 흉내 내기를 일삼던 나는 그보다 10년이나 늦게야 겨우 시인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돌아보면 그 시절에도 학생회 부회장을 맡아 정치에 관심을 보였던 최홍이 선배는 서울시의회 교육위원장을 지냈고, 학구적이었던 권영민은 서울대 교수에다 당대의 문학평론가로 우뚝 섰다.


1974년에는 아마추어 시인 300여 명이 모인 시인의 집동인을 결성, 조선일보의 후원을 받아 덕수궁 북쪽 담에 붙어있던 국립공보관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그 시화전 기간이던 815일 서울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었고, 장충체육관에서 육영수 여사가 피격을 당했다. ‘시인의 집은 그 뒤 1995년까지 20여 년 동안 용산도서관에서 <시소리 시낭송회>를 여는 등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100여 명의 시인을 배출하였다.


1981년에는 시 민벌에서 부는 바람으로 월간문학신인상에 입선하자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슴에 품었던 장차 시인이 되리라는 꿈이 이루어졌다는 착각에 빠진 나머지, 첫 시집 넝쿨담장(개마서원)을 묶어냈다. 1984년에는 두 번째 시집 오월에 날아온 수상한 꽃가루(시인의집)를 묶어냈는데, 이때는 줄곧 앓고 있던 위궤양이 심해져 암에 걸린 게 틀림없다고 지레짐작하여 유고집을 엮는 심정으로 그동안 썼던 모든 작품을 망라했으며, 덕분에 당국에 불려가서 시 두 편(‘흉가애국가’)을 삭제하는 동시에 서점에서 회수하겠다는 각서를 썼다.

 

 

 

 

 

회사에서 베풀어준 신춘당선 축하연, 최일남 선생님과 김중배 선생님이 술잔을 높이 들었다

 


 

1986년에 이르러서야 단편소설 낱말찾기가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됐는데, 1966년 겨울부터 한 해도 빼놓지 않고 신춘문예 소설을 투고하여 19번이나 낙방한 끝이었다. 1988년에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마음을 비워야 하고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온갖 허섭스레기마저 끌어안아야 했으므로, 소설 창작에만 전념하기로 하고 마지막 시집 사랑쌓기를 묶어냈다.


1990년에는 소설집 낱말찾기(문예출판사), 1991년에는 소설집 어둠꽃(도서출판 예문), 1991년에는 장편소설 서있는 자의 꿈(문예출판사), 1995년에는 장편소설 거꾸로 흐르는 강(중앙일보사3), 2000년에는 장편소설 궁예(태동출판사3)를 묶어냈다.

 

 

 

 

오효진 선생님이 청원군수로 재직하실 때 동아일보문학회 회원들을 유채꽃밭으로 초청했다

 


2004년에는 한국소설가협회에서 제명처분을 받았고, 2005년 뜻을 같이한 분들과 함께 계간문예를 창간하며 편집장을 맡았으며, 장편소설 누가 너를 시인이라 불렀는가(계간문예)를 묶어내어 월간문학동리상을 받았다.

 

2010년에는 한국소설가협회 상임이사를 맡아 이동하 이사장을 돕게 되었고, 2011년 장편소설 초록의 전설(bookin)을 묶어내어 노근리평화문학상을 받았다. 20111월부터는 백시종 선배로부터 동아일보문학회 회장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별다른 활동을 못해 전전긍긍하게 되었고, 월간 한국소설을 편집하는 가운데 20159월부터 12월까지 우선덕 소설가와 함께 [한국디지털문학관] 실무를 맡았다.

 

 

 

 

부여국 졸본성에서 탈출한 주몽이 고구려의 터를 잡았던 오녀산성

 

 

 

 

 

 

앨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