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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세계

 


  귀신에 씌어 쉬 죽지 못하는 인생



소설가가 되기를 바라던 어중이가 있었다. 어쩌다 시인 명패는 꿰찼으되 솜씨는 괴발개발에 곰배팔이 솜씨였다. 한밤중 밭고랑에 파묻은 시는 씨눈을 틔우지 못해 캄캄한 바짓가랑이 휘감았고, 몸뚱이는 철망처럼 덮쳐드는 저주를 벗지 못하였다. 온갖 잡귀 다 모인 놀이판에선 시가 무슨 말이 그리도 많으냐, 깔깔대고 시시덕거렸다. 천지간 분간 없는 바람에 길 잃은 구름덩이 괴춤 그러쥐고 병신춤을 추었다.


신춘문예 열아홉 번 낙방한 19851월의 소한추위는 혹독했다. 몇 달 전 펴낸 두 번째 시집이 얼마나 설익은 투정이었으면, 그들의 부름을 받았을까. 봄까지 들락거리다 못해 각서를 써주고야 놓여났다. 단장의 아픔이라던가, 창자가 끊어지는 듯싶은 통증이 여름내 오락가락했다. 가을이 스쳐가고 초겨울의 한파가 잰걸음을 놓았다.


세세연연이 깊어가는 계절병이 도졌다. 123일부터 5일까지 사흘간, 여퉈뒀던 여름휴가 꼬랑지를 챙겼다. 해거름에 빈 지게 지고 장길 나서듯, 뒤늦게 원고지 몇 권 싸 들고 신촌 태양장에 틀어박혔다. 준비도 대책도 없었다. 지칠 만큼 지친 끝이었다. 더는 밀려갈 구석도 없는 막다른 골목, 하루가 지나가고 또 하루가 지나갔다.


밥맛도 입맛도 잃어버린 깔깔한 목구멍을 마지막 밤이 속절없이 틀어막았다. 오도 가도 못하는 캄캄한 세상, 숨통이 막히니 사지 뒤틀리고 머리통 깨질 듯했다. 에라, 열아홉 번 낙방한 것 스무 번인들 어떠랴. 사흘 동안 잉크 한 방울 맛보지 못한 원고지가 머리맡에서 바스락거리거나 말거나, 온갖 잡귀 다 모아놓고 놀이판을 벌였다. 그러다가 까무룩 정신 줄을 놓치기도 하면서 어물쩍 자정을 넘어섰다. 욕망도 희망도 포기하면 행복하다. 기지개를 켜고 두 발을 쭉 뻗었다.


귀신에 씌면 덧없어도 인생은 쉬 죽지 못한다. 꿈인 듯 생시인 듯, 손을 뻗어 낱말카드를 집어 들었다. 입대 전 국어사전 만들던 15년도 더 지난 옛날 일. 폭력, 낱말카드에 쓰인 글자가 저절로 읽혔다. 다음 구절이 주르르 흘러왔다가 주르르 흘러갔다. 누군가가 그걸 소리 내어 읽었다. 다음 구절도 주르르 흘러왔다가 주르르 흘러갔다. 꼭 받아 적을 만한 속도로, 자꾸만 자꾸만 흘러오고 흘러갔다.


벌떡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후다닥 일어섰다. 구석에 처박혔던 개다리소반 당겨놓고 원고지를 펼쳤다. 침대에 등 기댄 채 흘러오는 구절을 받아 적었다. 누군가 읽어주는 대로 줄줄이 받아 적었다. 어느덧 동창이 밝았다. 그래도 나는 가야 해. 길고 긴 밤의 강물에 실려 마지막 구절이 떠내려 왔다. 아침 일곱시, 원고지 70장짜리 소설이 끝났다. 욕조에 물을 받았다. 목욕을 마치고 태양장을 나서면서 세수를 마친 듯 해맑은 태양을 올려다봤다.


해장국이 입맛을 잡아끌었다. 가뭄 끝 소나기 맞은 푸성귀처럼, 나는 싱싱하게 살아났다. 아침 아홉시, 신문사 등짝에 달라붙은 우체국 창구, 원고뭉치에 침 바른 등기우표를 척 붙였다. 어느덧 휴가를 다 까먹고 말았으니, 출근을 서둘러야 했다.

나는 지금도 누군가 읽어주지 않으면, 글을 쓰지 못한다. 받아 적는 재주밖엔 없다.